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성희 님의 2018년도 ‘주요 국가의 장애 판정제도 비교 연구’와 2019년도 ‘장애인 고용통계’ 자료를 비교해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와 영국, 미국, 스웨덴, 호주, 독일 등 우리가 주로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의 장애 출현율이 유의미하게 차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19년도 기준으로 5.3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으며, 2018년도 기준으로 영국은 21.1%, 미국은 19.3%, 스웨덴은 16.1%, 호주는 17.7%, 독일은 14.9%의 장애 출현율을 보였다. 적게는 3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정말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이 많은 것일까?
아니다. 이는 장애를 규정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는 장애를 오직 의료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적인 외형이나 기능, 즉 ‘손상’을 가진 사람을 장애라고 정의했다. 이와 같이 ‘손상’에 초점을 두었을 때에는, 사회는 장애는 장애를 가진 개인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시선은 변화하고 있다.
장애를 개인의 기능적인 ‘손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애초에 장애인이 활동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환경이었다면,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모든 길에 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또는 세상에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체 일부의 어려움으로 계단과 턱을 오르는 것이 불편한 사람을 지체장애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시선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환경적으로 개인의 특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겼을 시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가 생겨나고 이를 ‘장애’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변화된 시선에서 사회는 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의 문제로 보고 있다.
변화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위에서 언급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적용되고 있다.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비만을 장애의 한 영역으로 포함하고 있다. 비만인 사람은 취직에도 불이익을 받고, 만약 취직을 했다고 하여도 승진조차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의미에서 개인의 특성이 수용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장애라고 정의한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스웨덴을 들 수 있다. 스웨덴은 외국 이민자를 장애의 한 영역으로 넣고 있다. 외국 이민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이 수용되지 못하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장애로 판별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사례를 보고 부당하다 또는 비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러한 반응은 우리 사회가 장애에 대하여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단어는 누군가와 우리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다.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어떤 불편함을 겪고 있으며, 어떠한 배려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규정한 단어일 뿐이다.
때문에 ‘장애’는 그 자체의 문제보다, 장애를 보는 우리의 부정적인 시선의 문제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장애 인식개선이란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과 낙인을 수정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 ‘장애’라는 단어가 주는 편견과 낙인이 줄어들었을 때, 사회는 더 많은 장애인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는 장애인을 위한 더 폭넓은 복지정책과 배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전북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