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혜 씨가 바깥 생활을 시작한 건 동장군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2007년 2월 말부터였다. 그는 서울 문래동의 한 지하도에서 박스를 깔고 잤다. 지하도 안이나 밖이나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추웠다고 한다. 그는 장소를 옮겨 을지로입구역에서 3년을 지내다 공원 장애인 화장실에 정착했다. 그는 낮 동안에 화장실을 청소했고, 밤 10시쯤에는 화장실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에 빠져들기 어려웠다. 공포감 때문이었다.
"낮에는 괜찮지만, 밤에는 무서워요. 가게 문 닫고 사람 없고 여기 나 혼자 있으면 진짜 잠이 안 와. 화장실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근데 갈 데가 없잖아요. 여기 말고 아주 낯선 곳에, 남자들만 있는 데 가서 잘 수 없잖아요. 이 노숙 생활은 전부 다 남자예요."
신간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후마니타스)에 나오는 여성 노숙자 이가혜 씨의 말이다. 책은 활동가들과 야학교사들로 구성된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이 2021년 봄부터 2년여간 길거리에서 만난 여성 홈리스 7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들은 거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미친 여자" "성난 여자" "말을 꺼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채록했다.
40대 미희 씨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술을 마신 아빠는 만날 엄마를 두드려 팼다. 엄마는 도망치다 붙잡히기를 반복했다. 결국 부부는 갈라섰다. 뇌전증을 앓고 있던 미희 씨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부모의 부재는 학대로 이어졌다. 10대가 되자 그는 주저 없이 가출했고, 뒷골목을 전전하다 한 남자를 만났다. 애도 낳으며 평범한 삶을 바랐지만, 꿈은 이뤄지진 않았다. 남편의 잦은 도박과 학대는 그를 다시 길거리 생활로 내몰았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그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고, 지금은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저자들은 여러 노숙인과 갈등을 겪으며 서울역 역사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경숙, 노숙인에서 이제는 노숙인 활동가로 살아가는 가숙, 분노조절장애·당뇨·녹내장을 앓으며 거리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영주, 쉼터 생활을 접고 이제는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는 진희 등 다양한 여성들의 신산한 삶을 전하고, 이들이 밟아온 가난의 경로를 조명한다.
책에 등장하는 상당수 여성은 남성 노숙자들의 폭언과 폭력, 성추행 등에 쉽게 노출된 삶을 살았고, 정신질환 등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 실제 책에 인용된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홈리스의 정신 질환 유병률은 42.1%로, 남성(15.8%)보다 배 이상 높았다. 이들은 절대다수인 남성 노숙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분투하며 제대로 된 지원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저자들은 "그녀들의 가방 속에서, 봉다리 속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분투하고 때론 타협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며 "아직 듣지 않았을 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닌, 그녀들의 말에 함께 귀 기울여보길 권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