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볼 때 너는 바로 나의 의지를 봐야 해. 내 몸의 선 하나하나가 보여주는 게 그거야."
한쪽 다리에 의족을 단 비보이 완혁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의족을 떼어내 버린다. 의족을 베개처럼 잠시 베고 눕더니, 어느새 바닥에 내버려 둔 채로 한 발로 일어선다. 완혁은 바닥을 구르고, 한쪽 발로 비틀비틀 쓰러질 듯 중심을 잡고, 두 팔로 물구나무를 서며 자유롭게 몸을 움직인다.
프리랜서 비보이이자 유튜버인 김완혁(33)은 10여년 전 당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놀랍게도 그는 절단 장애를 계기로 고등학교 때 포기했던 비보잉을 다시 시작했다. 느리면서 차분한 비보잉을 보여주는 그의 비보이 이름은 '곰'이다.
지난달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이 프랑스 연출가 미셸 슈와이저(65)와 손잡고 공연 '제자리'를 24~25일 선보인다. 모두예술극장은 국내 최초의 장애 예술을 위한 극장이다.
공연에는 김완혁을 비롯해 20대에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정신장애를 가진 류원선(54), 뇌병변으로 몸을 움직이고 말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사진작가 이민희(40), 시각장애인으로 장애인문화예술극회 '휠'의 부단장으로 창작 활동을 펼치는 이승규(43), 발달장애가 있는 무용수 이정민(26)이 비장애 배우들과 함께했다. 이들은 성을 뺀 자신의 이름으로 각자 맡은 캐릭터를 연기한다.
지난해 9월부터 창작진과 출연진이 세 차례 워크숍을 거쳐 완성한 공연은 옴니버스 형식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무대에 선 출연자들은 '빛', '나의 원자들', '칼날', '우즈의 춤', '처음', '우주와 의지' 등의 주제로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내용 자체는 모호하고 추상적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각각의 출연자들이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의미심장한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슈와이저 연출은 개막을 하루 앞두고 23일 열린 언론시연회에서 "각 배우가 가진 풍요로운 부분을 포착해 부각하려고 했다"며 "이 사람에게서 소중하고 빛나는 것들, 내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의족을 떼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여준 완혁처럼 시각 장애가 있는 승규는 관객과 다른 출연자에게 빛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빛을 준 건 무엇인지, 빛을 빼앗아 간 것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것이다. 그런 승규를 뇌병변을 앓는 민희가 카메라를 들고 촬영한다. 영상은 민희의 불안정한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아 뿌옇다.
슈와이저 연출은 이 공연을 통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공연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 예술적 측면에서 숙련된 사람과 상대적으로 숙련도가 낮은 사람들이 모두 있다"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연장은 단순히 제작한 공연을 올리는 곳이 아니라 삶의 현장이자 공동체가 형성되는 공간"이라며 "우리 프로젝트도 빈 종이에서 출발해 참여자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며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덧붙였다.
"극장 밖에 나가면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요.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말을 하거나 생각할 시간이 없죠. 하지만 극장 안에서는 가능해요.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잘 보고, 서로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죠."